"그러니까 나는 짜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라는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니까.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질문을 난제(難題)라고 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아니. 너무나 당연히 답이 정해져 있는 사실에 물음표를 넣는 게 되려 어색한 거 아냐? 그래 안 그래?
만약에 우리가 먹기로 한 메뉴가 중국요리로 딱 결정됐어!! 그러면 내 앞으로 온전히 할당되는 식사를 고를 때 나는 당연히 짜장면을 골랐었단 말이야. 그게 보통인지 곱빼기일지가 관건이라면 관건인 거고.
자.. 잘 들어봐. 나는 지금도 국민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중국집에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야.
아니지. 그때의 나한테는 짜장면집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암튼. 그맘때는 이사 아니면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집안의 '큰일'이 있다? 이거 기념하는 데 중국집 음식만 한 것이 없던 시절이란 말이지.
그리고 배달시키는 거 말고 직접 가게 가서 먹는 일, 이건 행사라고 부를 정도로 기대되는 일이었다구.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고.
저 어디냐.. 그때 수락산 아랫동네에 살 때 우리 집에 가려면은 큰 길가부터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 골목 시작되는 큰길에 짜장면집이 있었어.
한 3-4층 정도 되는 상가 건물인데 1층에 당시엔 아주 흔했던 풍경의 중국집이 있었단 말이야.
왜 그 시트지는 굳이 안 뜯어도 시간 지나면 군데군데 벗겨지잖아? 색도 바래고.
그래서 요즘은 잘 안 쓰는 거 같은데 그때는 식당에서 그걸 많이 썼었다고. 유리벽이며 실내 내부 같은 데다가. 여기도 마찬가지였어.
가게 안이랑 밖에다가 그렇게 시트지로 유리도 꾸미고 메뉴도 써놓고 벽 한쪽에는 일력(日曆)이 걸려있었지. 기름종이 닮은 하루에 한 장씩 뜯는 달력. 그쪽도 알지?
거기다가 나무로 만든 식탁이랑 의자가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이랑은 달라. 의자 등받이 쪽에 나무들이 각이 져서.. 그냥 딱 보면 '아 저거 옛날 건데' 같은 거 있어. 그게 일곱 여덟 개가 딱 있었지.
안쪽에 회식이나 좌식 손님 받는 조그만 방도 하나 딸려 있었고.
아 근데 가게에 들어가면 말이야 일단 주인이 '어서 오세요~'라고 하잖아.
이게 아주 형식적인 말인데 이제 막 국민학생이 된 꼬맹이 눈에는 다르게 들렸었어. 말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고 대우해 준다는 느낌이 촤~악 들더라는 거지.
봐봐. 어른이 존댓말을 하지. 표정이며 태도도 굉장히 호의적이잖아.
거기에 짜장면 먹을 생각에 애가 얼마나 들떠있었겠어. 이런 게 다 엮이니까 내가 그 중국집을 잊을 수가 있나?
거기다 거기서 나만의 최초 기록까지 세웠는데.
아!! 최초 기록이 뭐냐면. 처음으로 내 몫의 짜장면 한 그릇을 해치웠다는 거지.
우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 뭘 해? 그래 주문이지. 며칠 전부터 이미 어머니한테는 수없이 주문했었던 나의 짜장면이 드디어 가게에 정식 주문으로 들어갔단 말이야.
식당에 앉아서 주문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누가 봐도 평범하지. 평범한데. 그때 나한테 주문부터 내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의 여정을 묘사하라면 뻠삥 좀 넣어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라고 할 거야.
그래 요건 너무 거창하다는 거 인정할게. 근데 거짓은 없는 표현이다 이거~
유치원생이 학교에 간다고 하면 마냥 좋은 게 아냐. 꼬맹이들도 학교를 다니게 된다는 거에 부담감이라는 걸 느낀다고.
나한테도 그런 게 어느 정도 있었는데 점심 짜장면에는 비할 수가 없더라는 거야. 그 한 번인데.
그리고 학교를 간다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랑 짜장면이라는 약속된 즐거움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을 해야 내가 행복할까?
이걸 가지고 8살짜리한테 너무 본능적이라고 지적할 거야? 저기 지나가는 아무한테나 이름 대면 알만한 철학가 누구도 그런 소리는 안 할걸?
어쩌면 어른이랑 마찬가지로 나한테 주어진 짜장면 한 그릇을 중국집에서 먹은 일이 국민학교 입학식보다 몇 뼘은 더 큰 성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생각해.
당장 이렇게 남다른 추억으로 남은 걸 보면 얼마나 대단할 일이야?
참.. 면사리 있잖아 면사리? '면사리 추가'를 배운 것도 짜장면 덕분이었어.
국민학교 4학년 때지 아마. 어느 주말로 기억하는데, 집에 계시던 아버지가 오후에 갑자기 친구분을 만나러 나가시겠다고 하시는거야.
그러더니 문득 나보고 따라가겠냐고 물으셨는데 그때 약속 장소가 중국집이라는 걸 들었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중국집이니까 아버지도 나한테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어.
암튼 그걸 듣는 순간 점심 먹은 건 상관없이 신이 나서 따라나서는 게 당연했지 않겠어?
그때 아버지랑 친구분이 만난 곳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저쪽에 상봉터미널이라고 있었어. 거기 길 건너편 쪽에 있던 중국집이었지.
그분들이 마셨던 술이랑 안주는 아무리 생각해 볼라고 해도 기억이 안 나. 아마 거기서 나한테 허락된 짜장면 곱빼기 보다 중요한 게 없었으니까 눈에도 뇌에도 안 들어왔겠지.
우리 아버지는 인사하는 거랑 겸양 떠는 걸 자식들한테 무지하게 강조하셨었는데 그때 이미 이골이 나있어서 얌전한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내 짜장면 곱빼기를 마주하는 순간까지 말이야.
그렇다고 짜장면 곱빼기가 나왔을 때 뭐 흥분하거나 허겁지겁 먹었다는 건 아냐. 다만 얌전한 태도에 비해서 그렇지 못한 식욕이 아버지 친구분을 꽤나 놀라게 만들었다는 거지.
생각을 해봐. 10살 좀 넘은 애가 점심도 먹었다고 들었는데 짜장면 곱빼기를 거침없이 삼켜 넘기니 안 놀라고 배기나? 오죽하면 아버지도 그날따라 발군의 흡입력을 발휘하는 아들을 보고 어이없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셨는데.
그러니 서로들 내 나이랑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몇 차례나 읊었고 급기야는 중국집 주인아주머니까지 관심을 갖더라고.
가뜩이나 그 시간이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이니까 애가 신기하게 눈에 들어왔겠지.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라나? 짜장면 곱빼기 면을 온전히 내 속으로 옮기고 내 얼굴보다 조금 더 컸던 그릇에 면의 흔적이 완전히 안 보이기 까지가.
근데 여기서 또 짜장은 소복이 남았다는 게 중요해. 그 자리에 '짜장면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적을 못 참았을 거거든. 그리고 누가 봐도 왜 좀 그렇게 먹으면 아깝잖아~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이렇게 된 마당에 도전을 결심하신 거 같더라고.
뭐냐면 그 순간 나보고 '면사리 추가해서 먹을래? 먹을 수 있겠어?'라고 물으신 거지. 거기다 대고 나는 '면사리가 뭐예요?'라고 물었지.
그러니까 '여기 짜장이 남았으니까 면만 따로 달라고 해서 더 비벼 먹는 거야'라고 설명하시더니, '근데 너 점심까지 먹고 왔는데 이거 다 먹을 수 있겠냐? 괜히 못 먹을 거 같은데 먹지 말고. 먹는 걸로 미련하게 욕심부리는 거 아니야'라고 타이르는 말까지 덧붙이시는거야.
뭐 도전이라면 도전이지만 아버지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거고 아무래도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나도 거기서는 고민을 하긴 했지.
분명히 배는 부르지만 짜장면을 더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손꼽히는 즐거움이었니까.
나는 '예 먹을게요'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데나 호승심 부릴만한 한 나이였다는 것도 한몫했던 거 같애.
내가 도전을 선택했을 때 아버지 친구분의 유난스러운 헛웃음과 주인아주머니의 단발의 박수도 왜곡된 기억은 아닐 거야.
그렇게 그날 나는 짜장면을 원 없이 먹었지. 아버지는 집에 와서 본인이 목격한 걸 황당한 표정으로 가족들한테 증언하셨고.
아.. 내가 아까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짜장면과 짬뽕을 고민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었지??
그런 단서가 왜 붙었는 줄 알아?
이게 대학을 들어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잖아? 그러면 다음날 뭐가 필요해? 해장. 그렇지 아무리 젊어도 해장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술 마신 다음날 느지막이 아점을 먹을 일이 많아지는데 선택해야 하는 곳이 만약에 중국집이야. 크.. 그러니까 내가 짜장면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더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듣자마자 딱 이해가 되지?
나는 아직도 가끔 '한국 사람 몸에는 춘장이 흐른다'라는 말을 하지만 이게 타이밍이라는 게 있더라고.
한국인이니까 숙취를 해소해야 할 때는 국물을 뺄 수가 없어요. 이건 뭐 가슴이나 머리가 아니라 몸이 시키는 거야 아주.
그래서 내가 짜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하는 행위를 하게 되더란 말이지. 대신 그 와중에도 짜장면을 완전히 배신한 건 아냐.
뭔 소리냐면 얼마 가지 않아서 짬뽕밥을 해장의 주종으로 골랐거든. 짜장면을 짬뽕에게 패배 시키느니 짬뽕밥이라는 '전혀 다른' 메뉴로 짜장면에 대한 의리를 지켰지. 그럼.
거두절미하고 결론은 중국집의 근본은 짜장면이라는 마음을 절대 놓지 않았단 소리야.
자 그러니 요새 짜장면을 제대로 하는 곳이 없는데 대해서 내가 얼마나 분개하겠어?
사자표 춘장은 변한 게 없는데 그걸로 만드는 놈들은 어째 점점 별 볼일 없어지는 거냐는 말이지.
여기가 좀 제대로 합니다 하는데 가봐도 십중팔구는 엉망이야. 간짜장 제대로 하는 곳은 100군데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고.
우리가 제대로 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못 받으면 어떡해? 환불, 반품 뭐 이런 거 하잖아.
내가 보기에 요즘 짜장면이 딱 그꼴이야. 아주 돈내기가 아깝다니까.
어이~ 자네 내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나의 약간은 길었던 연설을 시종일관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맞은편 사내의 표정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귀찮음을 띄운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은 기특함과는 별개로 눈빛에 호의적인 기색은 전혀 없다.
"그러니까요 선생님. 선생님이 짜장면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 알겠는데요.. 아 저기 오시네"
사내는 말을 하다 말고 내 뒤편에 있는 출입문 쪽을 주목한다.
나도 아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향해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 내 옆쪽으로 선다.
"뭐예요? 아직도 안 끝난 거예요? 이런거 가지고 이렇게 길게 끌 거 뭐 있어요??"
그는 나를 힐끔 보고는 퉁명스럽게 내 앞의 사내에게 물었다.
"지금 한창 이분이 말씀하셨고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왜 이 분 가게에서 짜장면을 무전취식을 하셨냐고요? 결국 지금 내실 돈이 하나도 없으시다는 거예요?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 값도?"
나를 향한 하소연 섞인 말투에 사내의 뒤에 앉아있던 이가 일어서 나선다. 분명 나의 감동적인 연설을 귀동냥했을 사람이다.
"야 야 김 순경. 됐어 그만해. 이런 걸로 낭비하지 마. 이깟걸로 도대체 몇십 분을 이러고 있어?
이 양반이 먹은 거 얼마야? 내가 줄게"
크~ 민중의 지팡이 중에서도 파출소장은 역시 좀 다르구나.
"에헤이~ 아니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짜장면이 맛이 없어서 그런 거라니까?? 맛이 없어서!!"
당장 옆에서 중국집 주인이 노려보는 것과 상관없이 맛이 없었다는 말만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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