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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비틀어진 이야기

비틀어진 이야기 4 - 오래된 병장

by 서여다 2025. 6. 2.

자대에 온 지 3주 차.

야간 경계근무에 투입된지는 이제 갓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다.

자다 일어나야 하는 귀찮음은 상상이상.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환경과 임무에 대한 긴장감이 그보다 무거운 기분이란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은 자정에 투입되는 근무.

두 시간을 채우지 못한 잠을 쫓으며 다시 전투복을 챙겨 입는다.



"준비 다 됐으면 나와"

생활관 문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의 지시가 나를 향한다.

이은재 병장.

나와 함께 근무에 나갈 사수다.

보통의 경우 당직 근무에 들어갈 짬이지만 군번이 꼬여서 여전히 경계근무에 투입되고 있는 고참.

그렇지만 군에 말뚝 박으라는 제안은 진작부터 받고 있던, 간부들을 포함한 중대원 모두가 인정하는 '에이스'.

자대 생활이 얼마 안 된 나조차 이미 듣고 보면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예. 알겠습니다!"

자고 있는 다른 인원들이 깨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선명하게 대답하고 서둘러 따라나선다.



"당직사관님 경계 교대 인원 준비됐습니다"

당직부사관님의 보고에 당직사관인 2소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확인한다.

그는 시선으로 복장을 확인하고 손짓으로 개인화기와 탄창을 훑었다.

"오늘 암구호는?"

"연등 / 버선 이상입니다"

당직사관님의 질문에 이 병장과 나는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당직사관님.

"요즘 경계근무 특별점검 기간인 거 알지? 특히 야간 경계근무를 강조하고 있으니까 주의하도록 하자.

그리고 상급부대 불시 순찰도 예고되어 있으니까 근무 서는 동안 긴장하고.

참. 너희들 암순응(어두운 곳에서의 시각 적응) 훈련은 잘 되어있나?

만약에 조명이 안 비추고 있는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건 어떻게 확인할 거야?"

다분히 교범적인 확인과 질문.

이제 여섯 번 남짓의 일천한 근무 경험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질문은 처음이다.

마침 어제 당직사관이었던 김 중사님이 컵라면에 스마트폰 게임으로 근무 투입자를 쳐다도 보지 않았기에 더 인상적인 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서 적응을 하고 사물과 지형을 확인합니다.

한 곳에 시선을 너무 오래 두지 않고 전반적으로 살피겠습니다.

야간에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거수자는 주로 어둠 속에서 움직임과 멈춤을 반복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또는 마치 아주 느린 무빙워크를 탄 것처럼 서서히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서 경계근무 서겠습니다"

이 병장의 답변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당직근무자님들을 충분히 흡족하게 한 것이 분명하다.

당직부사관을 맡은 하사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려다가 어색하게 손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감탄하는데 가담했다.

'역시 에이스!'

물론 속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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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근무 초소까지는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어둠을 헤치고 가야 하지만 전술적인 이동을 위해 손전등 필터를 어두운색으로 바꾼 채 바닥만 확인한다.

"오늘 우리 근무 중에 누군가 올 수도 있다"

앞서가던 이 병장이 불현듯 작은 소리로 주장했다.

"점검 순찰 말씀이십니까?"

"...."

때론 침묵이 긍정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다.

나는 지금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이 병장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근무 간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지통실에 온도 보고는 10분 전에 완료했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중대장님이 야근 마치시고 퇴근하시면서 오늘 대대나 여단에서 순찰 올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중대 당직근무자가 소위와 하사라서 상급부대에서는 취약하다고 판단할 거기 때문에 우리 중대 쪽으로 올 확률이 높을 거랍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우리 앞의 근무자 중 선임인 박 상병님이 교대를 하며 전달한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당직사관인 2소대장님은 3개월 전에 오셨고 소대장님들 중에서도 막내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근무 투입할 때의 원칙적이던 모습이 또 다르게 해석된다.

그렇다면 설마 이것까지 내다본 것이었을까? 오는 길에 이 병장님이 했던 이야기는?

'역시 에이스!'



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경계 근무라지만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오죽하면 입대를 앞두고 예습 삼아 주워듣던 군대 얘기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썰들에서 공통적으로 '정신과 시간의 방'에 빗대던 임무 아니던가.

게다가 선임과 단둘이 보내야 하는 시간을 채울 책임은 후임에게 있다는 불문율도 적잖이 들어왔다.

거기에는 여러 주제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하며 재미를 위해서라면 적당한 구라 따윈 상관없다는 사실까지.

하지만 이 병장님은 이 부분에서도 남달랐다.

같이 근무하는 후임을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는데 동원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강요하지도 잡담을 건네지도 않았으며 싱거운 갈굼 조차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맡을 경계 지역에 대한 지침을 알려준 다음부터는 초소 안과 밖 모두 같은 데시벨을 유지할 뿐이었다.

오히려 답답한 것은 나였다.

에이스와 함께 있는 기회에서 얻을 것이 적지 않을 텐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튀는 건 손해'라는 군 생활 현자들의 가르침은 나 역시 가슴에 새겨두었다. 다만 그 못지않은 군 생활 최고 덕목이라는 눈치와 센스는 배워둬야 한다는 목표도 한편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근무 편성표를 확인하면서 에이스의 강의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근무 시간에 짬찌가 먼저 말을 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에이스에게 개념 없는 놈으로 찍히고 시작하는 자대생활의 그림은 굳이 눈치와 센스가 없어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잠깐!? 나의 바람에 대한 응답인가?

분명 상황 발생이다.

근무 투입 전 이 병장님이 묘사했던 아주 느리게 다가오는 움직임이 내가 맡은 경계 구역에서 포착된다.

급격히 높아진 긴장감과 함께 왠지 모를 기회라는 생각까지 두서없이 떠올라 복잡했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병장님 제 담당 구역에 거수자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보고를 하고 초소 문밖으로 나와 웅크린 채 개인화기를 조준했다.

훈련소에서 배운 절차를 실전에 쓴다는 흥분과 에이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감을 느낀다.

"정지! 정지! 정지!"

나름 최선을 다해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던졌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느린 움직임.

아직 20m 가량의 여유가 있지만 아무튼 통제되지 않았다.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급하게 초병의 다음 주문까지 던지자 움직임이 멈춘 듯도 하다. 애매한 확신을 무시하고 일단 다음으로 넘어간다.

"연등"

이쯤 되자 움직임이 멈춘 것은 확실해진다. 하지만 암구호에 답은 없다.

"연등"

다시 한번 답을 요구했다.

역시 없다.

난감하다.

진짜 거수자가 아니라면 약속된 플레이를 해줘야 하는데.

"잠깐 기다려"

그러자 초소 안쪽에 있던 이 병장님이 나선다.

나는 조준하고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로 거수자에게 향하는 이 병장님을 지켜본다.

덕분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고 천천히 드러나는 얼굴.

'고.. 고명..신.. 아닌데.. 고선..민..? 아!! 고선명!'

이제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거수자의 정체는 대대 정비반장인 고선명 상사다.

일과 중에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는 그의 이름을 생각해 내는 동안 두 사람은 소곤거리는 정도의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상황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세를 풀 수는 없었다.

그저 이 병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배운 대로 행동한다.

이윽고 두 사람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점검이 이어지지 않았고 경례도 없었다.

그리곤 고 상사님은 나타난 방향을 꺾지 않은 채 그대로 초소를 지나쳐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장 가까워졌을 때 언뜻 보인 그의 얼굴. 꽤나 초췌했다.



"훈련소에서 제대로 배웠구나. 잘했다"

아직 자세를 풀지 않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 병장님이 한마디 던진다.

"감사합니다"

에이스의 칭찬. 당장은 기분이 좋았다.

분명 알고 있는 교범과 거리가 있는 마무리였지만 상황은 원만하게 종료되었다.

무엇보다 에이스가 정리를 했으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지통실에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아마도 계획된 경계근무 점검이었을 것이기에 상황 종료를 보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니. 이건 따로 하지 마라"

의외의 대답. 짐짓 단호하기까지 하다.

"그렇.지.. 옙. 알겠습니다"

나는 반문하려 했지만 짧은 순간 짬찌라는 입장을 떠올렸고 에이스에 대한 신앙심으로 무전기에 올렸던 손을 뗐다.

선택은 다행이었다.

나를 향한 이 병장님의 짧은 미소가 일말의 석연찮음 따위를 날려주었기 때문이다.



"경계근무 특별점검 기간이고 오늘 우리 당직 근무 서는 간부님들이 취약하니까 똑바로 근무서.

새벽 2시 이후로 점검을 오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한데 가끔 여단에서 보내는 경우도 있으니까 방심하지 말고.

1시간 단위로 온도 보고하는 거 늦지 말고 근무 잘 서라"

다음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이 병장님의 전달사항에 고 상사님 이야기는 들어있지 않았다.

에이스의 선택이라지만 의외는 의외다.

아무리 약속대련 같은 점검이었더라도 공유가 되어야 나중에 문제가 안 될 텐데. 분명 군대에서 책임이란 건 최대한 던지는 거라고 듣기도 했다.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이 병장님은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막사에 가면 좀 소란스러울 거야. 뽀글이는 포기하고 그냥 담배나 한대 피고 자자"



정말이었다.

막 들어서려는 행정반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당직사관님이었다.

그렇게 들어선 곳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고 있는 당직부사관님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충성! 병장 이은재 외 1명 경계근무 복귀하였습니다"

이 병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보고를 마쳤고 형식적인 서류에 서명을 시작했다.

잠시 얼타고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따라 총기와 탄을 정리하는데 나섰다.

그렇게 행정반에서 나오기까지 나는 소란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정작 내용을 듣게 된 건 화장실에서였다.

생활관에서 조용히 군장을 해체하고 생활복을 갈아입은 뒤에 들른 화장실에서는 당직부사관님이 볼 일을 보고 있었다.

두 칸 떨어진 소변기 앞에 서자 그의 혼잣말이 새벽의 화장실을 채운다.

"하.. 씨바.. 하필 내가 근무 설 때 일이 터지냐"

이건 나에게 들으라는 이야기였고 짬찌의 질문도 받겠다는 의향이 다분하다고 해석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바쁘신 거 같습니다"

볼 일을 마친 당직부사관님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기 시작하며 짧은 설명을 시작했다.

"니가 알려나 모르겠다. 대대 정비반장인데.. 고선명 상사님이라고.

그분이 쫌 아까 술 먹고 음주 운전으로 집에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났댄다. 이미 죽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암튼 그거 때문에 이 시간 간부들 집이랑 숙소에 정위치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난리다 난리"

상대의 반응엔 관심 없이 하고 싶은 푸념을 던진 당직부사관님은 화장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나오려던 소변을 포기하고 주머니의 담배를 매만지며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이 병장님은 이미 흡연구역에 나와있었다.

그는 나도 알 수 없는 나의 표정을 봤음에도 별말이 없었다.

어렵게 불을 붙인 담배를 어떻게 피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반쯤 태웠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 상사는 하사로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술꾼으로 소문이 났었어. 그동안 자잘한 만취 난동 사고도 몇 번 있었고.

그나마 업무적으로 능력이 있는 편이라 상사까지 진급이 된 건데 결국 이 꼴이 난 거야"

질문 없이 전해준 대답. 이 병장님은 담담한 말투에 어울리듯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뱉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적잖은 이해를 주는 동시에 그 이상의 혼란스러움을 더했다.

그리고 이쯤 되자 왠지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음이 느껴진다.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나마 당장 물을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을 골라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저희 근무 설 때.. 아니..

이 병장님은 고 상사님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나의 질문에 이 병장의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분명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 병장.

이내 담배를 끄고 휴지통에 넣고는 몸을 돌려 막사로 향한다.

어렵게 쫓은 뒷모습에 그가 내뱉는 담배연기가 왜인지 똑바로 하늘로 올라가며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입구에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을 놓고 들어갔다.

"15년 전인가.. 고선명이가 하사로 전입 왔을 때도 내가 있었거든.

아까는 다른 인사를 온 거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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