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기사들도 제법 뜨고 랭킹도 상위권이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진종연이 순도 낮은 감탄을 던진다.
"뭐야 그런 반응은? 나 무시하는 거야?"
호텔 창밖을 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던 인초연이 가볍게 발끈하며 눈을 흘긴다.
"그래도 아직 끗발은 있나 보다? 이별 기사에 관심도 쏠리고. 그나저나 이제 뭐 할 거냐?"
"회사에서 개인 계정 SNS 분위기 바꿔준다고 잠깐 기다리래. 그리고 웹드라마 들어온 거 있다는데.. 아 진짜 짜증나!! 웹드라마 지겨워 죽겠는데..
공중파는 그렇다 치고 남들은 넷플릭스다 뭐다 하는데 난 뭐 하고 있는 건지"
"다 사이즈 대로 찾아가는 거란다. 주는 대로 해라"
"아 진짜 뭐야!? 말끝마다 짜증 나게!!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회사 광고 촬영 잡는다며 언제까지 기다려!"
"아.. 나도 아버지 눈치는 봐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언제 뻥카 친 적 있어??
야... 근데 너 목소리가 크다? 뭐 맡겨놓은 거처럼 지랄이야"
진종연이 짜증과 함께 날카로운 눈빛을 인초연에게 날린다. 순간 인초연은 움찔하고 눈길을 피한다.
"하.. 가뜩이나 사람 모으는 거 귀찮고 짜증나 죽겠구만. 안되겠다 너 일루와. 빨리 안 와?!"
진종연의 일갈에 기세가 꺾인 인초연이 주춤주춤 침대 옆으로 간다.
"나 피곤해. 오늘은 안 하면 안 돼?"
겁이 묻은 목소리로 인초연이 묻는다.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두 번 말 안 한다"
한쪽 팔로 인초연을 낚아챈 진종연은 다른 팔로 침대 옆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이례적인 전화에 이선이 의문형으로 전화를 받는다.
"아니 무슨 일은. 그냥 와이프 일하는 동네 와서 생각나서 전화했지. 지금 뭐 해?"
"뭐야 싱겁기는. 지금 순찰 중이야.
마트에서 사겠다는 건 다 샀어? 가을이는?"
"어 쫌 아까 다 사고 이제 슬슬 집으로 가려고. 가을이는 뒷자리에서 자고 있어. 오늘 늦는 건 아니지?"
"응. 순찰 마치고 들어가서 업무 정리하면 평소대로 퇴근할 거야 아마"
"아 그리고 우리 이번 주에 이태원에 태국..... 어? 어!! 뭐야 저거!!"
아내와 통화를 하며 차창 밖을 보던 재승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동시에 주변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뭐야 오빠 왜 그래?"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선이 다급하게 묻는다.
"이선아 여기 지금 칼부림 나는 거 같애. 젊은 놈이 칼 들고 설치고 있어. 그.. 그 바이마트 앞이야!!"
"뭐라고!?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오빠 함부로 나서지 말고 가을이 잘 지키고 있어!!"
둘은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은 재승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요즘 시끄러운 묻지마 칼부림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지금 마트 앞에서 칼을 들고 설치고 있는 청년은 재승이 지켜봤던 그 청년이 맞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언뜻 봐도 흐트러진 옷과 행동만큼이나 눈빛 상태가 좋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미쳤거나 술 취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재승은 그가 마약에 취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위험한 그의 행동이 더욱 신경 쓰이는 건 머리 위 검은색 아이콘의 반짝임이 매우 빨라졌다는 점이다.
순찰 중이던 이선에게 상황을 전달한 만큼 경찰에 신고한 상황은 됐다. 하지만 아무래도 도착하는 데 수 분은 걸릴 터라 그동안의 주변 안전이 걱정이다.
지금 청년은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간헐적으로 마치 목표물을 찾듯 주변을 둘러보며 씩씩거리기도 한다. 정말 누구한테 마음먹고 달려들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것 같은 분위기다.
재승 역시 겁이 나면서도 나름의 대응책을 생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자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전문가의 의견이 떠올랐다.
기억에 따르면 전문가 역시 묻지마 칼부림이 벌어질 경우 당연히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최우선이고 빠른 신고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약에 대치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복수의 사람이 주변을 환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칼부림 행위자가 특정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대응을 위한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이는 시간을 지연하고 행위자의 덤벼들려는 공격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 기억해 낸 재승의 눈에 전신주 밑으로 다리가 부러져 버려진 나무의자가 보였다.
딸과 함께 있고 이선의 당부도 있는 상태에서 극도의 고민에 이르렀지만 지금 저놈의 아이콘이 깜빡임을 멈추고 선명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빡임이 멈추는 순간이 범죄의 완성이고 지금 상황을 봤을 때 그 범죄가 누구 한 명이 큰일을 당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직감적인 해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린 재승은 차 문을 잠그고 버려진 나무 의자를 들었다. 여전히 겁이 나지만 일단은 놈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앞서고 있다.
마침 마트 입구 쪽에서 급하게 나와 도망치려는 아주머니에게 놈의 시선이 고정되려 하고 있다. 달려든다면 몇 초도 안 걸릴 거리다.
그리고 놈의 자세를 보니 그 순간이 임박했다.
"헤이!! 야 인마!!"
재승이 큰 소리로 놈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 들고 있던 의자로 땅바닥을 팍팍 쳐 보인다.
다행일까? 일단 놈의 관심은 끌었다. 기대한 이론대로라면 이제 놈은 주춤거려야 한다.
어라? 그런데 재승에게 슬금 슬금 다가온다.
'하.. X 됐다'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재승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찔리는 건 피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일단 의자를 가슴팍 높이로 들고 슬쩍슬쩍 움직인다. 정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눈은 마주치지 않고 칼에다가 시선을 둔다.
이건 대련도 아니고 시합도 아니기 때문에 일단 막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놈이 하는 여러 말 중에 욕만 알아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놈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놈은 재승의 앞 쪽으로 와서는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는며 위협을 한다. 그럴수록 최대한 집중력을 높인다.
의자와 칼이 몇 차례 부딪히자 놈이 자기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지 흥분 게이지를 높인다. 마주한 상태에서 그 흥분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러다 막무가내로 달려들기라도 하면 난감해질 것이 분명하다.
퍽!!
이때 무언가가 날아와 놈의 옆머리를 강타한다. 머리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의 정체는 우유팩이다.
놈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우유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야말로 그림 같은 플라잉 니킥이 날아와 놈의 안면에 꽂힌다.
콱!!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놈은 뒤로 몇 바퀴 구르며 뻗었다.
재승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놀라면서 환상적인 몸놀림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인공은 비니에 유난히 큰 헤드폰을 끼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 일부러 얼굴을 가린듯한 차림새였지만 그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부터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리고 체육을 전공한 재승이 아닌 누가 보더라도 느낄 수 있는 다부진 체구까지 더해져 독특한 아우라를 갖췄다. 여기에는 그의 유난히 사뿐한 걸음걸이도 한몫하는 듯하다.
플라잉 니킥 남은 뻗은 놈을 향해 다가가며 땅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 먼 곳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놈의 상태를 확인하고 몸수색을 시작했다.
다른 흉기가 없는지 살피는듯하더니 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잠시 확인하고 놈의 가슴팍으로 툭 떨어트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폰으로 놈의 얼굴 사진을 찍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수군대며 조금씩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은 지난 것으로 보이지만 분위기가 회복되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현장에 도착하고 있다.
플라잉 니킥 남은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칼부림 청년의 옆에 있다가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리를 떴다. 그는 자리를 뜨기 직전 재승을 힐끗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재승은 그의 시선에서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순간적으로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경찰 조가 도착하고 곧이어 이선의 조가 도착했다. 경찰들은 먼저 청년의 상태를 살피고 칼을 회수한 뒤에 주변 상황을 파악하며 피해자 유무를 확인했다.
한쪽에서는 재승을 발견한 이선이 다가온다.
"손에 그건 뭐야 한재승씨?"
재승은 그때까지 한쪽 손에 의자를 들고 있었다.
"어?? 아 이거... 호신용 의자라고나 할까.."
이선의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며 일단 대답한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가을이는?"
"응 보다시피 다친 데는 없어. 아직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거 말고는... 가을이는 차에서 자고 있지.
어라 꿈틀대네? 깼나 보다 가봐야겠다"
어설픈 화법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내를 더욱 자극하는 것이 될 것 같아 가을이를 핑계로 재승은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속상하네.. 암튼 집에서 봐"
"옙. 참치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능청을 쥐어짜내며 인사를 대신한다.
그렇게 차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뻗어있는 놈을 향해 다가가는 나이 많은 여성분이 보인다.
경찰의 제지로 인해 가까이 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그분은 하얀색 주사기 아이콘 아래로 세상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이선의 퇴근은 약간 늦어졌다. 낮에 일이 있어던 장소가 관할 지역이었고 사건 담당을 한 만큼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탓이다.
재승은 일찌감치 가을이 저녁을 먹이고 잘 씻겼다. 집안 정리도 평소보다 신경을 썼으며 참치를 먹을 세팅까지 완벽하게 마쳐놓고 있었다.
8시가 훌쩍 넘어서야 퇴근한 이선이 씻고 재승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고생했어. 오늘 많이 바빴겠네?"
재승이 청하를 따라주며 말을 건넨다.
"그렇지 뭐. 그래도 누구 다친 사람 없다는 건 다행이구. 이게 그 위험한 참치인가?"
이선이 술잔을 받고 답하며 참치 한 점을 집어 든다.
"아찔하게 구하긴 했는데 맛은 아직 모르겠네~"
이선의 농담이 섞인 멘트에 재승은 약간의 안도를 하며 답한다. 한점씩 참치를 먹고 첫 건배를 한 뒤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이선이 말을 꺼낸다.
"오늘 전화로 상황을 들었을 때는 나도 많이 놀랐어. 현장에 도착해서 남아있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고.
그 와중에 오빠 손에 들려있는 의자를 보자니 어느 정도 그림들이 그려져서 순간적으로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야"
재승은 가볍게 끄덕거리며 인정과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경찰이라면 가족의 용기 있는 행동을 칭찬하고 응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경찰이기 전에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로 나서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
"응 누구라도 그럴 거라 생각해. 그래서 나 역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런데 사건 정리할 때까지도 속상하던 거에 집중되던 마음이 집에 오면서 조금은 달라지더라구.
나와 함께하는 한재승이라는 사람이 사명감의 농도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
아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라는 생각 같은 게 떠오르더라. 그러자 내가 몰랐던 부분도 아니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라는 마음도 조금씩 생기고"
"난 가족에게 걱정을 끼친 건 무슨 이유가 됐든 미안하게 생각해. 와이프가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사실 나도 무슨 생각에 나섰나 싶은 마음도 있어. 다시 해보라고 한다면 장담 못 할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얘기하면서도 분명히 하고 싶은 말도 그 부분이야. 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또 나서지 말라고 할 거야.
오빠의 마음과 결심을 존중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역할과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응 맞아. 일단 이런 일이 다시는 없는 게 좋을 거고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만 하지는 않을게"
"그래 가장 필요했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처음에 이렇게 얘기를 해야 기분 좋게 참치를 먹지"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둘은 다시 가벼운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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