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아이 체육선생 19 - 골프 라운딩
딱!!
"나이스 샷"
짝짝짝!!
조경이 남다른 컨트리클럽의 고요함이 깨진다. 권은혁의 드라이브에 함께 라운딩을 도는 멤버들이 보내는 환호와 박수 때문이다.
"예전 같지는 않은 거 같애.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드나 봐"
멋쩍음과 겸손을 적당히 표현하며 권은혁이 미손 띤 얼굴로 화답한다.
"에이~ 한창이신데요 뭘. 비거리부터 저하고 별로 차이도 안 나시고. 하하"
건장한 체구에 쉰 살 남짓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한번 권은혁의 드라이브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야 조 회장이 맞춰주니까 그렇지. 참 아버님 요즘 건강은 좀 어떠시고?"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긴 하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어머니도 같이 계시고"
"지금도 가까이에 살고 계시지?"
"예 저희 집 건너편에 계십니다"
조 회장이라고 불린 조상현은 휴진 그룹 회장이다.
휴진그룹은 재계 순위 20위권을 유지하는 대기업으로 중공업과 첨단소재, 건설 등을 영위하며 넓은 입지를 자랑한다. 그는 3세 경영인에 해당되는데 4형제 중에 맏이로 그룹을 이어받았다.
현재 다양한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휴진그룹 한가운데에 조상현이 있는 셈이다.
조상현의 부친인 조선구 전 회장은 그룹의 본격적인 성장을 도모한 주역이면서 그 시절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들이 가지고 있는 흑역사 역시 함께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횡령과 배임, 탈세, 분식회계 등 우리나라에서 기업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하는 대부분의 경제사범 전과가 조선구에게도 있다.
조선구와 권은혁이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검찰에서였다.
부장검사 시절 권은혁은 조선구와 휴진그룹의 일부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검사와 피의자로 만난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류하는 관계로 바뀌어갔다.
권은혁이 조선구와 휴진그룹을 처음 수사할 때는 소위 탈탈 털며 꽤 많은 비리를 적발해 냈다.
한창 열심히 일할 나이와 상황, 사회적 관심 그리고 비리 종합세트라고 할 만한 노다지의 휴진그룹이다 보니 언론에 알려진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를 권은혁은 캘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조선구다.
어찌 보면 한참 어린 검사에게 민망한 꼴을 당하며 목줄을 잡힌 모양새였지만 그는 그렇게 당황하지도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알고 보면 당연하다. 그가 기소를 당한 것이 권은혁을 만난 때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이미 검사장급 이상의 인물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다수의 전관 변호사들을 데리고 있었기에 권은혁과의 만남을 일종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권은혁이라는 떠오르는 검사와 관계 형성을 시작하는 기회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그런 그도 두 가지는 잘 정리되어야 한다며 채비를 했다. 우선은 사회적인 관심과 지탄이었다.
정치인과 연예인은 악플도 관심이고 무관심보다 낫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기업인의 입장은 다르다.
좋지 못한 내용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은 기업인 개인은 물론 기업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쉬운 예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영위할 경우 기업 이미지는 매출에 직결되지 않던가.
휴진그룹은 당시 사업 구조상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기업 이미지가 안 좋게 형성되어 있을 경우 관련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전례로 언급되거나 정권의 본보기로 먼저 맞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조선구 역시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권은혁과 만난 사건에서도 성실히 임하겠다는 한껏 낮춘 자세와 병색이 드러난 행색으로 무장해서 등장했다. 너무도 뻔하지만 고령의 기업인이 활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방법이고 최소한 마이너스는 없는 패턴이다.
그리고 뉴스에 비춰질 뿐인 잠깐의 굴욕은 생각보다 더 짧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당장은 집어삼킬 듯 불같이 타오른 큰일 같지만 대중의 뉴스에 대한 관심과 지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뿐더러 또 다른 자극적인 뉴스로 쉽게 이동하는 것이 생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형(刑)이다.
1심 판결에서 결정된 형이 높지 않아야 2심과 최종심까지 가는 과정에서 더욱 낮추고 집행유예가 붙는 최종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1심에서의 검사 구형이다.
조선구는 권은혁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 그의 성향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검찰의 인맥과 변호사단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은 해두었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결정적인 순간까지 안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다행히도 권은혁은 '상식'적이었다.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판결은 전례가 강력하게 작용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기업인의 경제사범에 대한 구형과 판결은 한없이 너그럽고 공식(公式)화 되어있었다. 권은혁 공식을 따르는 편이었고 굳이 정의를 찾는 타입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조선구는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어차피 그룹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는 큰 의미가 없었고, 집행유예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사면으로 형 선고 실효·복권 대상에 포함되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조선구의 일화 중 가장 짧은 한 가지는 그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최종심이 발표된 뒤 차에 탄 조선구를 향한 수행비서의 고생 많으셨다는 말에 대한 그의 대답.
"그렇지. 내가 고생했지. 뭣도 모르는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여기는 대한민국이야"
조상현이 조선구로 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이후로 잡음은 의외로 길어졌다.
조상현이 대표로 그룹을 이어받는 것은 큰 틀에서 문제가 없던 것으로 보였으나 넷이나 되는 형제끼리 나누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이 생긴 것이다.
재계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명 '형제의 난'을 휴진그룹도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새였다.
특히 둘째인 조상문은 아버지와 형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그룹의 비리 폭로부터 경영능력에 대한 비판, 인격침해 등의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조상문은 그룹의 거의 모든 공식 직책에서 물러나 해외로 나가는 결말을 맞았다. 그리고 사태는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조상현은 체구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게 집요한 면이 있었다. 수 년이 지나도록 조상문에 대한 개인과 기업 차원의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권은혁은 조상현과 관련된 소송을 담당한 적은 없지만 그와 휴진그룹을 후원회의 얼굴로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파악은 필요했다.
거기에는 조상현의 성품과 언행도 중요하게 포함된다는 것이 권은혁의 판단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9홀까지 라운딩을 마쳤다. 일행은 그늘집으로 가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아버님이 그렇지 않아도 권 변호사님을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현이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으면 말을 꺼낸다.
"찾아뵌 지도 오래됐는데 말씀만으로도 고맙네. 허허"
"아버님 말씀도 있으시고 변호사님이 아직 후원회장 자리를 결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니 제가 한번 맡아보겠습니다. 다른 분야 인물들이야 변호사님이 잘 선별하시겠지만 이쪽에서는 저희만 한데도 없지 않겠습니까?"
조상현의 직설적이면서 자신만만한 표현이고 모습이다.
"그렇잖아도 그 부분을 이야기해야지. 이미 강주필 전 UN 대사께서 후원회장 자리에 화답해 주신 만큼 공동 후원회장으로 경제계 쪽 인사에게 부탁을 하려고 구상 중이었네.
알다시피 공동후원회장이다 보니까 체급도 맞춰야 하고 내 입장에서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어"
"저희 정도면 말씀하신 대로 급도 모자랄 것 없고 강 대사님하고는 저도 안면이 있는 사이니까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진유건설 진 회장과의 대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공동후원회장의 존재를 포함한 권은혁의 구상이 그대로 대화에 등장하고 조상현 역시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적극적으로 타진한다.
"회사 경영 상황에는 무리 없겠나?"
"후원회장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몇 차례 행사 참석과 얼굴마담 역할 아니겠습니까. 조직적인 지원은 얘기해 놓겠습니다"
"참.. 동생이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어느 정도 정리는 됐고?"
권은혁이 지나가는 식으로 던진 질문이지만 분위기는 살짝 냉각된다.
문제의 원인을 애초에 차단하는 신중함으로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온 권은혁다운 질문이지만 조상현 입장에서는 과한 혹은 상황과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는 느낌을 더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단순하게 따져봐도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녀석이야 이제 집안사람으로 치지도 않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변호사님 지원하는 문제와는 관련도 없고요"
조상현의 대답에서도 선을 그으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이어 그는
"얼마 전에 저희 사외이사 한 분이 공단 대표에 들어간 거 아시죠?
대통령님 후보 시절 캠프에 있다가 선거 마치고 저희 쪽 사외이사로 와 계셨습니다. 임기가 한참 남았지만 저쪽에서 부르셔서 흔쾌히 보내드렸고요"라고 덧붙였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다.
권은혁에게 줄을 대려는 입장에서는 대통령실과의 관계가 가장 크다. 권은혁의 대통령과 동문에 검찰 출신이라는 점과 서울고검장이라는 이력은 남다르다.
더구나 용산으로 출마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밀착관계에 의한 사전 교감의 결과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높은 기대를 받는 선수로서의 가치 즉, 유망주로서의 의미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유력하다 하지만 공천이 확정된 상황도 아니고 선거에 있어서 초선 출마라는 불확실성은 크다. 서울고검장 출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급이나 그 이상 급의 전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대통령과의 관계성이 상당 부분의 우려를 덮지만 유망주와 당선자라는 현격한 차이만큼 권은혁도 준비 과정에서 처신의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입장이다.
조상현의 말은 이 부분을 꼬집고 들어간다.
당선된 대통령 캠프에 있었던 사람, 바꿔 말하면 공로가 있는 대통령의 측근을 사외이사로 챙겼다는 사실. 그리고 임기도 마치기 전 부름에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칠 정도로 이미 용산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결국 조상현과 휴진그룹이 권은혁을 지원하는 것은 또 하나의 루트를 만드는 것이지 꼭 목을 맬 상황까지는 아닐 수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잖아도 소식은 들었네. 공시도 따로 내야 하는 만큼 썩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고마워하셨겠네"
"더 큰일 하시겠다는데 보내드려야죠. 권 변호사님도 큰일 시작하시려는 만큼 잘 밀어드리겠습니다"
조상현은 단정 지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권은혁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가벼운 미소만 얼굴에 띄운다.
"암튼 능구렁이 같은 양반. 자기한테 안 좋은 건 하나도 묻힐 생각이 없다니까"
권은혁이 떠난 뒤 자리에 남아있던 조상현이 비서실장 들으라고 한마디 내뱉는다.
"소문 대로인가 봅니다?"
"아버지도 저 양반은 자기한테 해가 될만한 문제는 애초에 철저하게 피한다고 하더라고. 일하면서 이것저것 돌파하다 보면 여기저기 상처도 나고 뭐 묻기도 하는 거지 뭐 저렇게 재는지.. 아직도 지가 고검장인 줄 아나"
"그래도 이번 건은 성사시키셔야죠?"
"당연하지. 저 사람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챙겨 놓을 줄은 챙겨놔야지.
혹시나 저쪽에서 뭐 요청하는 거 있으면 일단 들어줘. 드럽고 아니꼬와도 여기 대한민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