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오드아이 체육선생

오드아이 체육선생 8 - 사건 일단락

서여다 2025. 6. 2. 17:30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노강완은 나를 만난 다음날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이유로 불미스러운 일에 결부되었음을 시인하기도 했는데 사건이 공식화되면 다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20년이 조금 안되는 프로생활에서 쌓였던 수많은 소회는 간결하게 전하는 대신 좋지 못한 일로 은퇴하는 자신에 대한 지탄을 피하지 않겠다는 예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상징적 인물의 갑작스러운 퇴장이고 사건 내용에 대한 관심까지 더해지자 주목의 크기는 노강완의 선수 시절 중 가장 높았다.

그리고 이틀 뒤 서인직 일당에 대한 체포 소식이 전해졌다.

출국금지 조치가 이루어진 직후 서인직은 공항에서 체포되었고, 이석현은 자신의 집이 아닌 여자친구 집에 숨어있다가 잡혔다.

이들 외에도 국내에서 회원 모집책 두 명을 검거했으며, 베트남 현지에 있는 5명의 사이트 운영 관리자와 관련자들을 베트남 공안과 협력해서 신병을 확보했다고 광역수사대는 밝혔다. 이들에게는 도박 개장과 승부조작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다.

자연히 관련 선수들의 명단도 공개가 됐다. 여기에는 노강완을 비롯한 프로야구선수 4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 이름값으로는 노강완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련 기사가 노강완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노강완이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은 지난 시즌부터였다고 한다. 당장 은퇴를 결심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지만 선수로서의 욕심과 자부심이라고 포장되었던 것이 2년 가까이 되었던 셈이다.

원인은 돈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프로야구 판에서 선수가 은퇴를 하고 코치를 지원하게 되면 이전의 이름값과 상관없이 연봉 5천만 원으로 시작된다. 노강완이 선수로서 받는 연봉에 비하면 분명 낮은 금액이다.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은퇴 이후에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활약하는 요즘이지만 노강완은 기록과 인지도 측면에서 경쟁력이 매우 낮다. 승부조작과 불법 베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따랐다.

확실히 친구 승환의 기사는 여타 기사들보다 내용에 있어서 훨씬 심층적이었고 자세했다.

서인직과 노강완의 특별한 관계는 물론 만남의 장면까지 담고 있어 다른 기사들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에 광수대 김 반장으로부터 받은 몇 개의 소스들이 버무려져 3편에 이르는 시리즈 기사 모두가 히트를 쳤다.

우리가 김 반장의 수사 진행 정도가 상당했음에 놀란 만큼 김 반장 역시 우리가 파악하고 있던 사실과 사진에 대해서 놀랐다고 승환은 전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승부조작 범죄는 그 특성상 기자와 일반인 조합으로는 파헤치기는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 이랬다. 덧붙여 노강완 건을 끝으로 출국하려던 서인직을 직전에 잡았으니 더욱 고마운 부분도 있다는 전언이다.

한편으론 씁쓸함도 없지 않다.

이번에 파악된 서인직 일당의 승부조작과 불법 베팅 사이트 운영 규모는 1200억 원에 달했다. 이석현의 우루스가 이해되면서 복권방 주인아저씨를 포함한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베팅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은 반갑지 않은 사실이다.

승환은 김 반장의 '일단'이라는 표현도 흘려들을 수 없다고 했다. 이번 사건에서 축소시킨 것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계열로 수사 중인 건이 있는 건 아닌지 불확실한 표현으로 읽힌다는 의심이다.

사실 우리나라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가 프로야구다 보니 그동안 이런 사건들에 민감하고 적당히 덮고자 하는 외압 아닌 외압도 공공연히 있어왔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국제 대회에서의 실망스러운 성적과 갈수록 낮아지는 경기력에 이런 사건들까지 겹치면 누구도 좋을 일 아니라는 관점이다. 체육선생인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서인직 일당은 잡혔다. 하지만 내 생각은 또 다른 곳에 잡혀있다.

인초연의 아이콘이다.

주사기인 것을 봐서는 약물 또는 마약이다. 노강완에게도 하얀색 아이콘이 보였지만 최소한 그는 약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 인초연은 대마초 경력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마약류가 아닐까라는 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민우의 회사는 용산에 있다. 재승이 사고 당하던 날 용산에서 모인 것도 민우의 회사 위치가 고려됐다. 세 사람 각각 서울 외곽과 수도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교통상으로 용산이 편한 점도 있었다.

민우는 영업부서에서 일하다 보니 외근도 잦은데 용산·서울역·이태원 일대는 특히 빠삭하다. 만나고 상대하는 사람도 다양하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도 그렇다.

"이름 있고 믿을 만한 회사에서 거금 들여 투자하고 있는 사업이라 안정성은 확보되어 있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래도 좀 뜬금없지 않아요? 건설사에서 갑자기 화장품 같은 걸 판매한다는 게"

민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건설사에서 맥락 없이 마스크팩이나 건강기능식품 등을 판매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업 차원에서 신성장동력으로 미는 거야. 생긴지도 아직 1년이 채 안 됐고 확장일로에 들어서는 분위기니까 늦으면 기회가 없어. 그 진유건설이 미는 거라고"

"그러니까 김 사장님 말씀은 제이제이넷이란 곳이 진유건설이 100% 출자해서 만든 회사고 거기에 회장 아들이 대표로 있다. 본격적으로 네트워크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는데 회원번호가 빠를수록 유리하다 이 말씀인데.

근데 어쨌든 이건 그냥 다단계잖아요"

"양 과장도 참 답답하네. 없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검증된 상품 싸게 유통시키는 사업이라니까.

요즘 누가 비싼 돈 들여가며 매장 짓고 판매하나? 이마트나 홈플러스도 허덕거리는 판국에. 좋은 제품 유통마진 최소화해가지고 판매자나 소비자 모두 이익 가게 하는 사업이라고.

쿠팡이나 다른 인터넷에서 판매하지 않는 상품들도 있다니까. 그리고 조만간 전문 모델도 내세워서 광고에 나설 계획이래"

"그래서 사장님도 시작하셨다고요?"

"나도 두 달 밖에 안됐는데 왜 미리 시작 안 했나 싶어. 그리고 양 과장 보고 지금 당장 뭐 하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날 때 사업설명회나 한번 오라는 거지. 내가 백날 떠들어봤자 그냥 한번 제대로 들어보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화, 목 일주일에 두 번 이 근처 사무실에서 두 시간짜리 사업설명회 정기적으로 있으니까 들러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들어봐서 아님 마는거고. 어차피 손해 볼 거 없잖아~"

"그래요 알았어요. 조만간 한번 들를게요"

영업일로 먹고산 지 10년이 넘은 민우이기에 네크워크 마케팅, 그러니까 다단계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높은 등급이나 꾸준한 고수익의 핑크빛 유혹에 혹 할 만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부업을 해야 하나 하고 있던 상황에서 진유건설이라는 유명 기업의 자회사라는 것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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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젊은 남자 목소리의 상대방은 자신을 이석현의 새로운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이전 변호사와 같은 로펌이었다.

"의뢰인의 요청으로 제가 음주운전 건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한재승님의 합의 의향을 확인하고자 연락을 드렸습니다"

"피의자가 얼마를 제시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 아내와 합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이석현의 승부조작과 불법 베팅 관여를 모르는 상태였고 뉴스가 나오면 기사 내용을 중심으로 공유할 생각이었다.

아내는 몸에 큰 무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일단 저쪽에서 제시하는 금액을 듣고 판단하자는 의견을 냈다. 아내 역시 음주운전에 대한 경멸은 나와 비슷하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해야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아내에 따르면 이석현이 동종의 전과가 없다는 것과 나의 피해 정도가 심각하게 증명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형사처벌 형량을 가볍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변호사를 통해 꾸준하게 연락을 해오는 것이 합의를 위한 노력이라고 비칠 것이라는 점과 변호를 맡은 로펌의 능력에 따라 가벼운 징역에 얼마 되지 않는 집행유예로 정리되지 않을까 예상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경찰이고 관련 부서에도 자문을 받은 결과일 테니 상당히 일리 있는 견해다.

아내의 이야기에 따라 나 역시 수긍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치밀한 놈들이라면 이미 상당한 돈을 빼돌려 놓았을 공산도 크다. 그래서 부르는 금액도 그만큼 클지도 모른다.

"5000만 원 정도면 어떠실까요?"

무심코 소리를 낼 뻔했다.

음주운전을 경멸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받은 진단 수준에 대한 합의금 관례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이다.

역시 돈은 제대로 땡겼나보다.

순간적으로 흔들렸지만 나름대로 결심한 바에 따라 거절할 생각이다. 누군가는 꽉 막혔다고 답답해하겠지만 내 마음이 용서치 않는다.

그리고 이석현이 승부조작과 불법 베팅 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면 형사합의가 안된 음주운전 건과도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다.

"그냥 궁금했던 거고 합의 의사는 없습니다. 재판 잘 받으라고 전해주세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젊은 변호사도 나의 대답이 적잖이 의외였는지 약간 당황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전화 끊겠습니다"

솔직히 통화를 지속한다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나의 결정으로 이석현이 거창한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계속 들것 같다.

하지만 다들 가끔은 '이러고 싶을 때'라는 게 있지 않나? 어떤 이해관계나 계산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고 싶은 순간.

하필이면 내가 지금 그렇다.

심란한 마음에 잠시 창밖을 본다. 전경이 특별히 좋은 곳은 아니지만 17층이라는 높이가 주는 전망과 감상이 있다. 기분을 갈무리하고 돌아선다.

아내와 합의하에 당분간 거실 한편에 걸어두기로 한 페르시안 자수 가방이 보인다. 이 가방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쌓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시리 가까이 가서 매만져 본다.

'응? 안에 뭐가 들어있네?'

[단 하루!! 파격 할인행사!! 놓치지 말고 아래 품목을 확인하세요!!]

가방에 들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심히 헷갈리고 있다. 이건 야구장 티켓과 태정고등학교 졸업앨범처럼 가방에서 생겨난 것인지 아내가 그냥 대충 넣어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보는 마트의 요란한 디자인과 폰트가 가미된 전단지였고 마트의 위치도 옆 동네라 할 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내 이선이 속한 경찰서 관할이다.

아내에게 물어봤지만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방에서 생겼다는 것인데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건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중요한 문제다.

전단지의 할인 행사는 당장 내일.

급한 대로 찾아갈 구실을 위해서 적당한 물건이 있나 한 번 볼까.

어라? 생참치가 이 가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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