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아이 체육선생 1 - 아이콘 등장
눈이 아릴만큼 필요 이상으로 밝은 빛. 익숙하지 않은 천장. 복잡한 두통.
병원이었다.
"끄응.."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힘겹게 눈을 뜨자니 한 명의 익숙한 경찰과 두 명의 낯선 경찰이 보인다.
"오빠 정신이 들어?"
익숙한 경찰, 아니 아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근무 중에 온 것인지 옷도 못 갈아입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두통이 숙취 만이 아니라 뇌진탕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일단 눈을 뜬 것부터 다행인 상황.
"이선아 여기 무슨 일이야? 아흐.. 그나저나 병원 같은데 내가 여기 왜 있지?"
"차량과 충돌해서 쓰러지셨습니다. 운전자가 음주상태였고 사고 후에 도망치지는 않아 신병은 확보해둔 상태입니다"라고 낯선 경찰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대답했다.
이어 "일단 깨어나신 건 확인했으니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라며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이선이 가벼운 경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용산에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터였다. 첫딸을 위한 육아휴직에서 복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 어렵게 시간을 냈지만 애석하게도 사고로 이어져 버린 모양이다.
주량을 넘어선 음주는 아니었던 탓에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아 다행이면서도 사고의 찝찝함이 같이 다가오는 것은 영 별로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기껏 친구들 만나러 가더니 다치기나 하고.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러게 기분 좋게 마시긴 했는데.. 미안하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미안함 못지않게 스스로에 대한 짜증과 민망함도 만만치 않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래?"
"오빠가 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건물에서 나오던 차가 오빠를 쳤나 봐. 그래서 쓰러졌는데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기절을 한거 같대.
뭐 목격자들 이야기는 그런데 CCTV 확인해 봐야지. 깨어났으니까 곧 CT 촬영해 볼 거야. 다른데 몸은 어때? 거북하거나 그런 건 없어?"
"두통이 좀 있기는 하고, 왼쪽 팔이 약간 뻐근한 거 정도."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억의 해상도가 조금은 올라갔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으로 향하던 길에 왼쪽 건물 주차장에서 차량이 튀어나와 놀랐던 것 까지는 얼추 그려진다.
"그런데 이 가방은 뭐야? 샀어? 오빠는커녕 남자들 취향도 아닌 거 같은데"
문득 이선이 병상 옆에 있는 가방을 들어 보이며 묻는다.
"가방?"
처음 보는 가방이다. 한쪽으로 매는 스타일의 커다란 주머니 같은 가방.
이국적인 패턴이 페르시안 자수로 이루어져 있고, 한켠에는 뜬금없이 내 이름 '한재승'이 새겨져 있다.
움찔.
이선에게서 가방을 건네받는 순간 왼쪽 눈이 순간적으로 욱신 거린다.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놀랄만한 통증.
"왜 그래? 많이 아파?"
"아냐. 갑자기 움직여서 잠깐 근육이 놀랐나 봐"
아내를 더 걱정시키기가 미안해서 대답을 둘러대고 가방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낯설다.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일단 눈 좀 붙여. CT 촬영하게 되면 다시 알려줄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CT 촬영을 해야 한다며 이선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통과 숙취는 전보다 더 가라앉은듯한 느낌인데 의외의 변화가 생겼다.
이는 아내 이선이 먼저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오빠 한 쪽 눈이.."
"응? 뭐? 눈이 왜?"
"눈 색깔이... 왼쪽 눈 색깔이 이상해졌어!!"
뜬금없는 이선의 말에 거울을 찾으려고 했지만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 모드 화면을 켰다.
그리고 확인하게 된 회색, 아니 은색에 보다 가까운 왼쪽 눈.
두 눈의 눈동자 색깔이 다른 것을 흔히 오드 아이(odd Eye)라고 부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을 뿐이고 그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쪽 눈이 이렇게 변하다니.
"일단 침착하고 시력부터 확인해 보자. 오빠 한쪽씩 눈을 가리고 제대로 보이는지 봐봐"
당황하고 있는 나를 보며 이선이 주문했다.
그녀의 말대로 한쪽 눈씩 번갈아 가리며 사물이 제대로 보이는지 확인해 봤다.
이선의 얼굴, 가방, 수액 병, 응급실의 각종 기기들.. 다행히 두 눈의 문제나 차이 그리고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당장 보이는 건 문제가 없는 거 같어. 아프지도 않고"
"그래? 그럼 일단 CT 촬영 마치고 결과 확인하면서 의사선생님께 물어봐야겠다. 하아.. 참 속상하네"
'속상하네'라는 표현은 이선의 말버릇 중 하나다.
버릇이기도 하지만 가끔 드러내는 감정 중 단어 뜻과 딱 붙는 말이면서도 '정말 기분이 안 좋다'라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머리 쪽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두드러진 외상이 없어 혹시 안쪽에 문제가 있을까 싶으셨겠지만 CT 결과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음주와 일시적인 충격이 맞물려 정신을 잃는 경우는 드물지 않죠"
검사 결과를 본 중년 의사의 소견에 한편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부부는 눈에 관해 물었다.
"오드 아이라고 말하는 홍채이색증은 대개의 경우 선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른 피부와 마찬가지로 멜라닌 색소 농도 차이 때문이죠.
다만 아주 드물게 일부 외상이나 안과질환 치료 약물에 의해 발현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시력 문제와 실명에 이르는 부작용도 발생하긴 합니다.
환자분의 경우 사고 직후에 나타난 증상이라 마음이 쓰이시겠지만 아직 시력에 문제는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니 일단 추이를 지켜보시죠"
개운치 않은 상황이다.
머리에 이상은 없어 보인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어쩌면 생길지 모를 눈의 문제라니. 결국 며칠간 입원을 하고 후유증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오후에 병실로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피의자와 변호사였다.
30세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피의자는 인사와 함께 건넨 명함에 있는 과장 직함과 그렇게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
더욱이 설정일지 진짜 죄책감일지, 또는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인지 표정의 정리가 불안정하다.
반면 동행한 변호사는 관록있는 장년(長年)의 표본으로 보일 정도로 첫 느낌만으로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위 3대 로펌에 꼽히는 곳의 소속이었다.
한마디로 상당히 비싼 변호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승의 시선을 잡은 것은 병실로 들어설 때부터 보이는 피의자 머리 위 두 개의 아이콘이었다.
소개를 마친 일행을 향해 "병원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죠? 사고도 그렇지만 먼저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오시는 게 무례하네요"라고 이선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이에 "정말 죄송합니다. 실례 일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빨리 피해자분을 찾아뵙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석현이 대답했다. 이석현은 피의자 명함에 있는 이름이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이번에 불미스럽게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라며 옆에 있던 변호사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이었다.
당연하면서도 빠른 본론이다.
"사람이 다친 일에 책임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쓰시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충분한? 피의자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사처벌이 신경 쓰여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 아닌가요?"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의 이선이 지적하고 나섰다.
"저희 측에서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다치신 정도와 회복에 대한 관심도 그에 따른 태도라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아내분께서 현직에 계셔서 더욱 노하시는 것도 당연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조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참고로 요구되는 피해 보상과 합의 규모도 일반적인 수준의 수 배로 준비할 예정입니다"
노련한 변호사는 이선의 지적을 완곡하게 피해가면서도 오히려 이선이 현직 경찰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과 큰 금액의 합의금 의향을 흘리며 자신감의 일부를 드러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재승이 나섰다.
"내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것도 알고 오셨습니까? 체육과목을 가르치다 보니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게 정정당당하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싫어하는 게 음주운전이에요. 음주운전은 그야말로 예비 살인이니까.
애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면 강조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한다는 표현보다 혐오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젊은 방문객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나이 많은 방문객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음주운전하는 놈들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거 어쩌죠 더 큰일 났네요. 이 눈 보입니까?
어젯밤 있었던 일로 이렇게 변했는데 그런 놈들을 앞으로 더 이상 어떻게 봐야 할지"
재승의 눈을 주목하는 두 사람. 은색 빛 한쪽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제야 변호사의 얼굴에 약간의 움직임이 생긴다.
"합의고 뭐고 그딴 거에 관심 가질 생각보다 내 몸 걱정이 먼저니 더 이상 열받게 하지 마시고 가시죠"
말을 할수록 흥분도가 올라가는 것과 함께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성격이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다. 동시에 형성된 차갑고 어색한 분위기.
"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환자분과 가족분의 마음에 십분 공감합니다. 모쪼록 별 탈 없기를 기대하며 건강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역시나 변호사가 정리하는 말을 하고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돈 많은 놈인가 봐. 변호사 직접 대동해서 이렇게 빨리 후속 조치 나서는 경우가 흔치는 않거든. 처음에 사과만 하고 잠자코 있는 걸 보면 코칭 받은 거 같기도 하고. 암튼 합의 서두르고 싶어 하는 게 보이네"
"그러게"
"일단 오빠 몸이 회복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것만 우선 생각하자. 그리고 사고 장면도 다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해."
"응 그렇게 하자"
재승은 이선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바로 이석현의 등장부터 눈에 보였던 머리 위 두 개의 아이콘.
하나는 차와 술병이 겹쳐진 빨간색 아이콘, 다른 하나는 야구배트와 돈이 겹쳐진 파란색 아이콘이었다. 당연히 처음 경험하는 현상이고 당황스럽다.
사람 머리 위로 떠있는 아이콘이라니 상식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이선이 별말이 없는 것을 보면 재승에게만 보이는 것 같은 상황까지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해석은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빨간색 아이콘은 이석현으로 인해 재승이 당한 사고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면 그럴듯하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파란색 아이콘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고민이 생긴다. 과연 이선에게 아이콘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라는 것.
'이것도 사고 후유증인가', '일시적인 착각은 아닐까', '이제야 조금 진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한 이야기로 또 다른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등의 생각이 난립하며 당장은 이야기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재승이 이렇게 결심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병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